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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냉면은 어떻게 ‘힙스터’의 음식이 됐을까
  • 2017.08.02.
[리얼푸드=고승희 기자] 홍대의 다양한 뮤지션들이 소속된 한 가요기획사 홍보 팀장은 여름만 기다리는 평양냉면 마니아다. 한 여름 그를 만나려면 장소는 무조건 평양냉면 집이다. 이 홍보팀장은 “가게마다 미묘하게 다른 육수 맛을 찾아내다 보니 평양냉면에 빠지게 됐다”며 “먹으면 먹을수록 알게 되는 깊은 맛의 세계가 매력적이다”라고 말한다. 평양냉면 입문자는 이해 못 할 세계다.

평양냉면은 ‘무미’(無味)의 대명사 격인 음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달고 짜고 기름진 맛에 길들여진 젊은 세대라면 평양냉면 한 젓가락에 눈살을 찌푸릴 법도 하다. 그런데 지난 몇 년 사이 ‘평양냉면’은 ‘힙’한 음식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실제로 서울 시내 방방곡곡 이른바 ‘평양냉면’ 맛집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곳들에 젊은 세대가 줄을 늘어선 장면을 목격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을지면옥, 평양면옥을 필두로 을밀대, 우래옥, 필동면옥, 봉피양에 젊은 세대가 적잖이 눈에 띈다. 아예 힙스터들의 골목인 홍대, 마포 일대에 신흥 평양냉면 맛집들도 생겨나고 있는 추세다. 

사실 평양냉면은 ‘실향민의 음식’이다. 현재의 평양냉면 맛집들 역시 실향민이 북한 땅을 마주보며 가게를 시작해 대를 이어가고 있다.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차가운 냉면 국물에 말아먹는 평양 지방의 향토음식이다. 평양에선 음식에 양념을 적게해 담백한 맛을 즐긴다. 그 맛을 그리워하던 실향민들이 전국 각지에 자리잡아 평양냉면 장인이 되고 있다. 매콤하면서도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인 함흥냉면과 함께 냉면계의 양대산맥쯤으로 불린다.

평양냉면 소비계층의 변화는 불과 몇 년 사이 진행됐다. 한 때는 어르신들의 음식이었던 평양냉면은 지난 몇 년 사이 미식가의 음식, ‘음식맛’을 아는 사람들의 음식이라는 옷을 입게 됐다.

젊은 세대가 평양냉면의 새로운 소비계층으로 등장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지난 몇 해 2030 세대 사이에선 이른바 ‘세터’(setter), ‘힙스터’(hipster) 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됐다. 특히 대중문화계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졌다. 대형 팝스타들의 음반을 유통하는 한 음반유통사의 홍보 과장은 “대중문화계를 중심으로 세터, 힙스터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해 새로운 소비시장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힙스터’는 1940년대 미국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말이다. 유행 등 대중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패션이나 음악, 문화를 좇는 부류를 뜻한다.

대중문화계에서 힙스터 문화가 보여진 대표적인 사례는 ‘LP의 부흥’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 시장의 부흥은 디지털 음원 시대의 역설이었다. LP를 통한 소리와 정서는 물론 소장가치까지 높이 평가돼 난데없이 10대부터 30대까지의 세대를 아우르는 트렌드가 됐다.

‘힙스터 문화’의 확산 과정에선 재밌는 사례도 나온다. 한 대형 음반사 관계자는 “요즘 10~20대 소비자들은 턴테이블(축음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장하기 위해 LP를 구매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노래도 모르고 아티스트에 대해 알지도 못 하지만 LP를 구입하는 10대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힙스터의 문화가 되기 위한 선결조건은 ‘취향의 차별화’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취향이 아닌 비주류의 희소성을 즐기는 것이다. 때문에 소장하는 것만으로 남들과 다르다는 취향의 차별화를 부각시키고, 그로 인해 문화적 우월감도 주는 것이 이들 문화의 특성이다.

평양냉면이 인기를 모은 방식은 이 같은 힙스터 문화의 형성과정과 닮았다. 



사실 식음료 업계는 힙스터들의 소비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 중 하나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남들과는 차별화되는 프리미엄 제품을 찾고자 하는 힙스터들의 소비가 활발하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식음료 업계라고 꼽았다. 전 세계적으로 수제맥주와 스페셜티 커피가 인기를 모은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실제로 미국엔 힙스터들의 카페 전문점 리스트가 공유되고, 힙스터 푸드 리스트가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쿡방, 먹방 시대 돌입 이후 생겨난 음식 프로그램을 통해 평양냉면 맛집이 꾸준히 소개됐다. 이 과정을 통해 평양냉면은 특별한 음식이라는 스토리텔링을 입게 됐다. 실제로 평양냉면이 가진 스토리가 남다르다. 평양면옥의 양대 라이벌은 의정부계와 장충동계로 나뉜다.  의정부계의 경우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수한 의정부 평양면옥을 필두로 첫째 딸의 필동면옥, 둘째 딸의 을지면옥, 셋째 딸의 본가필동면옥이 중심이 된다. 장충동계는 어머니와 큰아들이 장충동 평양면옥을 운영한 이후 둘째 아들이 논현동 평양면옥, 딸이 분당 평양면옥, 큰아들의 사위가 도곡동 평양면옥을 운영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계파까지 나뉘어지는 이 독특한 가족 경영 시스템이 소비자들의 호기심을 끌었고, 대를 이어 운영하는 '장인 정신'이 냉면 한 그릇에 담기게 됐다. 양지 사태, 돼지고기 등을 넣고 하루 이상 끓여낸 육수와 메밀과 전분을 적절히 섞어 뽑아낸 탄성 좋은 면발, 특색을 달리 한 고명까지 '전통의 맛'으로 자리잡게 됐다.

게다가 방송을 통해 평양냉면의 맛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미식가의 기준이 되는 것처럼 비쳐졌고, 그 맛을 음미하며 구별하는 것이 미각이 발달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른바 '평냉 부심'이라는 말이 생겨난 계기다. 보편적인 맛의 기준을 벗어나는 ‘밍밍한 맛’이 고난도의 평가 기준이 됐다.

급기야 ‘평냉투어’라는 말이 생길 만큼 전국 평양냉면 집을 순회한 마니아들의 후기가 온라인과 SNS를 뒤덮으며 평양냉면은 마니아 음식으로 먼저 자리를 잡았고, 힙스터와 세터들의 사랑까지 받게 됐다. 마니아들의 경우 혀가 구별하는 깊은 맛을 평양냉면의 매력으로 꼽는다. 심지어 “냉면이 다 같은 냉면이지”라고 볼멘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평양냉면 맛을 아냐”는 한 마디면 금세 으쓱해지는 기분도 동반하는 문화. 이 같은 이유로 여느 힙스터 문화에서처럼 평양냉면 역시 먹는 것만으로 차별화를 부각시키는 음식이 되기도 한다.

한 방송사의 음식 프로그램 PD는 “꼭 그렇지는 않지만 방송이 미식의 기준을 바꾸는 때가 많다”며 “자극적이지 않고, 심심한 맛을 구별하는 것이 진짜 발달한 미각이라고 은연 중에 보여준 것이 평양냉면의 사례이고 그것이 유행이 돼 맛이 없다고 느끼면서도 먹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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