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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 조절이 필요한 당신 ①] 화 참는 지혜 없으면 당신도 ‘갑질 후보군’
  • 201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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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층 뿐 아니라 일반인도 갑질 가해자
-대부분 잘못 형성된 자존감에서 기인해
-상대적 박탈감으로 분노조절장애 나타나

서울 시내 한 백화점에 근무하는 회사원 김모(40) 씨. 직업 특성상 다양한 성향의 고객들을 상대할 때가 다반사다. 경력이 짧지 않기에 이상한 성격의 고객을 만나더라도 잘 참는다고 자신한다. 그런데 갑질하는 이른바 ‘진상 고객’을 만나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다. 고성까지 일삼는 고객이 다녀간 날이면 스트레스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도 두 배로 더 피곤하다.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을 자려 술을 마셔봤지만, 소용없었다. 병원에 간 그는 ‘불면증이 심각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사진=123RF

갑질이란 갑(甲)이란 단어 뒤에 행동이나 태도를 뜻하는 접미사 질이 붙어 만들어진 조어다. 갑질은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주변에 존재해왔다. 하지만 최근들어선 우리 사회 심리적 병폐를 대표하는 하나의 용어가 돼 버렸다. 지난해 한 취업 포털 사이트에서 직장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상사의 무리한 요구, 욕설, 모멸감을 겪었거나 고객사의 갑질을 당했다는 직장인은 전체의 88.6%나 됐다. 직장인 10명 중 9명이 갑질을 경험한 셈이다.

중요한 것은 갑질이 이처럼 재벌 등 일부 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퍼지면서 사회 병리학적 현상을 퍼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인 역시 갑질과 무관치 않은 것이다. 이에 갑질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분노를 조절하는 훈련이나 캠페인을 사회적으로 벌여야 한다는 이야기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갑질, 잘못 형성된 자존감이 원인=갑질은 대부분 잘못 형성된 자존감이 원인이다. 이에 대해 이종하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갑질을 일삼는 사람은 자신이 매우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건강하지 못한 자존감은 상대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불 같이 화를 내거나 폭력을 행사하게 만든다”고 했다.

갑질을 일삼는 사람은 현재 자신의 언행이 상대에게 어떤 감정적 영향을 미칠지에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경제적, 사회적, 인격적으로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한다.

자신에 대한 삐뚤어진 확신이 그런 생각에 힘을 실어 준다. 부, 명예, 재력이 곧 자신을 대변한다고 생각하기에 ‘나=대단한 사람’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낸다. 이런 공식을 바탕으로 ‘나는 그럴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무례를 범해도 되며 이는 사회적으로 묵인된다’고 여긴다. 언행에 제지를 받지 않고 넘어가게 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되면서그 공식은 마치 불변의 법칙처럼 확신으로 변한다. 결국 갑질이 매우 당연한, 문제시 될 이유가 하나도 없는 행동으로 생각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갑질을 당해도 참고 넘어가는 사회적 분위기도 갑질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이 발간한 ‘직장 내 괴롭힘 실태와 제도적 규율방안’ 보고서를 보면 최근 5년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해 직접적 피해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가 66.3%나 됐다.

피해 유형으로는 ‘협박, 명예훼손, 모욕 등 정신적인 공격(24.7%)’과 ‘업무 외적인 일을 시키거나 과도한 업무를 지시하는 등의 과다한 요구(20.8%)’가 가장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한 상담 경험이 없는 노동자도 66.7%에 달해, 대부분 속으로 삭이는 경향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자존감보다 배려심 키우도록 자녀에 교육을=실제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여러 정신 질환을 보인다. 자신에 대한 불확신과 불안정한 심리 상태 때문에 우울증을 앓게 되거나,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해 들끓는 내면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분노조절장애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자존감이 높아야 행복하고 갑질을 안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자존감이 높고 낮음보다 어떻게 형성됐느냐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개인의 기질, 성격, 성장 과정을 통해 건강하게 형성된 자존감은 대인관계에서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서도 “부, 재력, 사회적 지위와 같이 사회 평가적 요소로 인해 형성된 자존감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갑질을 일삼는 사람은 실제로 건강한 자존감을 지녔다고 말하기 어렵다. 갑질하는 사람의 지나치게 높은 자존감은 실은 확신이나 긍정적 내면의 힘의 작용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최면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내면에는 ‘나는 그럴만한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노력하지 않고 얻은 부와 명성으로 쌓은 위태로운 위치’라는 생각도 함께 존재한다. 그래서 불안해하며 누군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을 대하지 않을때 분노를 표출하고 노심초사하며 화를 쏟아내는 것이다. 결국 갑질하는 사람의 자존감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이라는 이야기다.

이 교수는 “건강한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노력, 주변의 격려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단순히 자존감만을 높이려는 교육이 아니라 긍정적 개인적 경험과 안정적 대인관계를 통해 올바른 인격을 형성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필요하며 주변에서 지속적 관심을 기울일때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이처럼 바람직하지 못한 갑질은 대물림된다는 데 있다. 이 교수는 “자녀의 자존감을 높이려 노력하기보다 배려심을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하며 진짜 값진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교육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건강한 사회란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들로 이뤄진 사회가 아니라 건강하게 바로 선, 내면의 힘이 강한 사람들로 이뤄진 사회라는 것을 되새기도록 자녀에게 일깨워 줘야 한다”고 했다.

신상윤 기자/ke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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