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300만명분에 달하는 국내 혈액 수급의 독점 공급원인 대한적십자사에서 수백억원에 달하는 노후된 혈액선별검사기의 재선정 입찰을 놓고 공정성 시비로 6년째 유찰이 되는 볼썽사나운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대한적십자에서 쓰는 장비는 모두 지난 2007년부터 사용된 외국 글로벌 기업 A사와 G사 제품으로 노후화돼 2016년께부터 교체를 추진했지만 성능과 가격 면에서 객관적으로 검증된 장비를 새로 개발한 국내 벤처업체와 성능평가 과정에서 노골적인 ‘밀어주기’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시시비비가 장기화되자 그로 인해 피해를 받는 건 온전히 소중한 혈액을 기부한 국민의 몫이 되고 있다.
공기관은 공개 입찰에서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가 생명이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도록 위임받은 권한을 갑과 을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공기관의 신뢰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받는다. 더구나 6년이 넘는 유찰기간에 감사원과 보건복지부의 특별 감사를 통해 여러 번의 지적과 처분이 반복되면서도 11차례 유찰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국가 독점 혈액공급기관으로서의 자격을 의심하게 한다. 더군다나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국민건강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시점이다. 수백억원의 국민혈세가 소요되는 이런 사업평가는 업체의 규모나 브랜드가치가 아닌 오로지 성능과 가격경쟁력 등으로 평가돼야 한다. 국내 업체라고 특별히 인센티브를 줄 필요도 물론 없다. 수백, 수천억달러의 매출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의 제품이라고 영세한 국내 벤처업체의 제품보다 더 우수하다는 보장도 없다. 세계적인 제약, 바이오, 의료기기회사도 처음에는 직원 몇 명으로 시작해 혁신적인 제품으로 지금을 일궈낸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가 최근 제약, 바이오 분야에서 약진을 거듭하고 있지만 아직 글로벌 바이오기업이나 의료기기회사에 비하면 연구개발비나 연구인력 등은 턱없이 영세한 규모다. 어쩌다 신약 개발에 성공했다고 해도 천문학적 임상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대부분 기술수출(라이선스 아웃)을 하는 실정이다. 의료기기 쪽은 더 심하다. CT나 MRI 등 최첨단 의료장비는 국산을 찾아보기 힘들다. 얼마 전 중소벤처기업부가 자산가치가 1조원대를 의미하는 국내 ‘유니콘기업’ 수가 지난 2017년(3개사)과 비교하면 4년 만에 6배 증가해 18개사라는 성적을 발표했지만 국내 유니콘기업 가운데 헬스케어 분야는 단 한 곳도 없었다.
필자는 10여년 전 두개골이 더 이상 자라지 않아 뇌압으로 고통받는 ‘소두증’ 환아를 위해 뇌압을 낮추는 신의료기기를 한 지방대 의사가 개발했지만 관련 미국의사학회 가이드라인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사용이 좌절된 사례를 기사화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은 우리가 개발한 신기술보다는 미국 등 선진국의 가이드라인에 따라야 한다는 관련 의학회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해당 의료기기는 더는 빛을 보지 못했다.
우리 의료 수준은 이제 선진국에서도 연수를 올 만큼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기술사대주의’를 벗어날 만큼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물론 국내 업체들이 개발한 제품의 성능과 가격경쟁력이 뒷받침된다는 전제는 따른다. 국내 개발업체가 글로벌 제품의 성능 및 가격에 밀리지 않는 장비를 개발한다면 최소한 ‘지금까지 써왔으니까 그냥 쓰자’라는 고식적인 방식은 이제 재고돼야 한다. 영세하지만 잠 안 자며 연구해 피땀 흘려 거둔 성과를 격려하고 성장시켜 줘야 ‘유니콘기업’이 탄생할 수 있다.